개인의 탄생(3)

(준비하고 있는 책 원고의 일부입니다. 제목은 항상 ‘개인의 탄생’으로 붙습니다)

몸의 자유는 양날의 칼이다. 몸의 자유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할 경우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러한 함정 중의 하나는 몸에 관한 방종이다. 몸의 자유에 흠뻑 빠진 사람 중에는 보다 더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몸을 구속하는 전통을 죄다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파격적인 리버럴 풍조를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10년 8월 영국 에섹스의 주민 100여 명은 자선모금을 위한 이벤트로서 벌거벗고 롤러 코스터를 탔다.

이러한 집단 누드 놀이가 과연 자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일까? 누드는 누드고 자선은 자선일 뿐, 억지스럽게 둘을 연관 지은 행사였다. 예부터 누드에 대한 예찬은 있어왔지만 혼자 자연 속에서 누드로 돌아다니는 경우에만 공감이 간다. 예를 들어 19세기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숲 속에서 홀로 누드로 걷는 것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일찍이 이보다 더 자연에 다가간 적은 없었다. 일찍이 자연이 이보다 더 내게 다가온 적도 없었다…자연도 벗고 나도 벗었다…감미롭고 부드럽고 조용한 벌거벗음. 자연 속에서….아, 도시의 가련하고 비틀리고 호색적인 사람들이 이 경험이 무엇인지 알까? 알지 못 한다. 점잖지 못 한 짓이라고? 천만에! 당신들, 도시 사람들의 생각, 세련, 두려움, 체면이야말로 점잖지 못 하다. 몸 위에 걸친 옷이 어색할 뿐 아니라 점잖지 못 한 물건이 되고 마는 그런 감정상태가 종종 들 때가 있다.

휘트먼은 철저한 리버랄이었다. 그의 글과 편지는 그가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였던 영국의 문인 오스카 와일드는 휘트먼을 방문하고 와서, “그가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라고 자랑스럽게 떠벌이고 다녔다. 그러나 휘트먼은 여러 사람과 어울려 누드로 돌아다니거나 혹은 공공연하게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예찬한 바는 없다.

누드에 관해서는 멀리 19세기 미국의 휘트먼까지 갈 것도 없다. 1960년대에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이었던 김수영은 북한산 백운대 근처 바위에 올라] 홀랑 벗고 일광욕을 하는 것이 취미**였다. ‘거대한 뿌리’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나타나듯 평소 그는 미국에 대한 열등감과 미군에 대한 착잡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백운대 근처 바위에서 누드로 일광욕을 하던 김수영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벌거벗고 바위에 누워있는 젊은 미군 병사를 발견했을 때에 원초적 동지애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누드든, 동성애든, 양성애든, 프리섹스든 예부터 있어 왔지만 여러 사람 앞에 드러내거나 언급할 수 있는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는 최근의 일이다. 이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관하여 몸의 자유가 확대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몸의 자유가 이러한 리버럴한 상태, 즉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에 끝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 궁극적인 것은 별로 없다. 예를 들어 ‘몸의 자유를 위한 몸의 자유’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몸의 자유가 단지 전통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 위한 것이라면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우리 선배 세대, 우리 조상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몸에 자유는 보다 숭고한 것을 위해 사용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충만해진다.

몸의 자유가 의미를 찾지 못 할 때 빠질 수 있는 또 하나의 함정은 자살이다. 자살은 원래, 감당할 수 없는 기이하고 끔직한 비극에 부딪혔을 때 혹은 매우 치욕스러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의 아내인 조카스타는 자신이 오이디푸스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펠로피아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하여 아들 아이기스토스를 출산한 후 이 아이를 버린다. 세월이 흘러 이 아이가 집을 찾아 오게 되어 과거가 밝혀지자 펠로피아는 자살하고 만다. 조카스타와 펠로피아는 모두 치욕과 죄책감 앞에 자살로서 책임을 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자살은 비극적 사건이나 치욕스런 진실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삶이 의미없다” 혹은 “삶이 고단하다”라는 생각 때문에 많이 일어난다.

2010년 6월 트위터로 “자살하려 합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이가 있었다. 트위터로 자살을 예고했다는 점보다 오히려 쿨 한 태도가 섬뜩하다. 재개발 때문에 문을 닫게 된 식당에 앞에 붙은, “재개발로 폐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이용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는 문구를 연상시킨다.  자살도 가게의 폐업처럼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 젊은이의 자살은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모두 의미 없어. 내게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설득하려 들지 마. 안녕, 이 세상! 안녕, 삶!”

이런 쿨한 태도는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체제 아래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는 삶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의심, 즉 “삶에는 의미가 없다”라는 파괴적인 생각을 아주 오랫동안 품고 있을 때에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쿨 한 태도는 “내 목숨은 나의 것이다”라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감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체제는 개인이 의심을 품고 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고 개인주의적 감각을 기르도록 놔두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의 자살율은 세계 최고이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개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의미없어. 내 목숨을 내가 끊는 데 왜 참견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자살 예고 메시지를 보내고 쿨 하게 목숨을 끊은 젊은이의 죽음은 자살이 일상적(!)인 개인의 일이 되어버린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다.

개인으로 산다는 것이 이토록 황량하고 삭막한 일일까? 그렇다. 황량하고 삭막하다. 단, 몸은 개인의 대지를 딛고 있지만 머리는 아직 개인으로서 사는 법을 알지 못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이런 사람의 경우, 몸의 자유만 극단으로 치달아 자신을 파괴할 자유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다른 말로 죽음을 추구할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자살까페이다. ,

*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Sun-bath nakedness’

** 60년대 초만해도 평일에 북한산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댓글 4개

Filed under Nietzsche, Snap Shots

4 Responses to 개인의 탄생(3)

  1. nickle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의 궁극의 선택은 자살이지요. 좀 고상하게, ‘죽음을 추구할 자유’. 그런데 ‘개인으로 사는 법’을 머리로 안다는 뜻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과연 ‘개인주의’세계관에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평소 개인주의에 대한 의구심입니다.

    • 우선, 궁극의 선택은 자살이 아니라고 봅니다….

      ‘머리로 안다’는 것에 강조가 아니라…
      몸은 개인인데…머리는 아직 온전한 개인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거 좀….건방진 소리이긴 한데…
      허걱….나중에 한 번 삼겹살에 소주랑 함께…

      • nickle

        앗, 소주를 청해 주셨는데 답장이 늦었네요.(주 후반부터 골치아픈 일들이 연속이네여 ㅠㅠ)영광입니다.
        전 사무실은 선릉역 언저리(이건 자주 바뀌는 편..)
        집은 광화문 쪽, 편하신 곳을 주시면 삼겹살 정도는 제가 삽니다.

  2. 넵. 저희 집은 광화문에서 걸어서 40분. (에고..좀) 제가 이멜로 연락드릴께요.

댓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Log Out / 변경 )

Twitter picture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Log Out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Log Out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