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WP 통합 시도(2)

테스트입니다.

본문이 가는지, 그림이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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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페이스북하고 맞추려고 ..계속 시도중

내용없습니다. test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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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둥지를 옮깁니다

죄송합니다.  두 달 정도 글을 못 올렸네요.

쬐금 본격적인 이바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둥지를 옮겼습니다.

www.duduri.net

무료 전자책(pdf, epub) 파일을 배포하는 곳입니다.

가끔 들러 주세요.

Guten N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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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탄생(3)

(준비하고 있는 책 원고의 일부입니다. 제목은 항상 ‘개인의 탄생’으로 붙습니다)

몸의 자유는 양날의 칼이다. 몸의 자유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할 경우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러한 함정 중의 하나는 몸에 관한 방종이다. 몸의 자유에 흠뻑 빠진 사람 중에는 보다 더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몸을 구속하는 전통을 죄다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파격적인 리버럴 풍조를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10년 8월 영국 에섹스의 주민 100여 명은 자선모금을 위한 이벤트로서 벌거벗고 롤러 코스터를 탔다.

이러한 집단 누드 놀이가 과연 자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일까? 누드는 누드고 자선은 자선일 뿐, 억지스럽게 둘을 연관 지은 행사였다. 예부터 누드에 대한 예찬은 있어왔지만 혼자 자연 속에서 누드로 돌아다니는 경우에만 공감이 간다. 예를 들어 19세기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숲 속에서 홀로 누드로 걷는 것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일찍이 이보다 더 자연에 다가간 적은 없었다. 일찍이 자연이 이보다 더 내게 다가온 적도 없었다…자연도 벗고 나도 벗었다…감미롭고 부드럽고 조용한 벌거벗음. 자연 속에서….아, 도시의 가련하고 비틀리고 호색적인 사람들이 이 경험이 무엇인지 알까? 알지 못 한다. 점잖지 못 한 짓이라고? 천만에! 당신들, 도시 사람들의 생각, 세련, 두려움, 체면이야말로 점잖지 못 하다. 몸 위에 걸친 옷이 어색할 뿐 아니라 점잖지 못 한 물건이 되고 마는 그런 감정상태가 종종 들 때가 있다.

휘트먼은 철저한 리버랄이었다. 그의 글과 편지는 그가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였던 영국의 문인 오스카 와일드는 휘트먼을 방문하고 와서, “그가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라고 자랑스럽게 떠벌이고 다녔다. 그러나 휘트먼은 여러 사람과 어울려 누드로 돌아다니거나 혹은 공공연하게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예찬한 바는 없다.

누드에 관해서는 멀리 19세기 미국의 휘트먼까지 갈 것도 없다. 1960년대에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이었던 김수영은 북한산 백운대 근처 바위에 올라] 홀랑 벗고 일광욕을 하는 것이 취미**였다. ‘거대한 뿌리’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나타나듯 평소 그는 미국에 대한 열등감과 미군에 대한 착잡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백운대 근처 바위에서 누드로 일광욕을 하던 김수영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벌거벗고 바위에 누워있는 젊은 미군 병사를 발견했을 때에 원초적 동지애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누드든, 동성애든, 양성애든, 프리섹스든 예부터 있어 왔지만 여러 사람 앞에 드러내거나 언급할 수 있는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는 최근의 일이다. 이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관하여 몸의 자유가 확대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몸의 자유가 이러한 리버럴한 상태, 즉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에 끝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 궁극적인 것은 별로 없다. 예를 들어 ‘몸의 자유를 위한 몸의 자유’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몸의 자유가 단지 전통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 위한 것이라면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우리 선배 세대, 우리 조상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몸에 자유는 보다 숭고한 것을 위해 사용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충만해진다.

몸의 자유가 의미를 찾지 못 할 때 빠질 수 있는 또 하나의 함정은 자살이다. 자살은 원래, 감당할 수 없는 기이하고 끔직한 비극에 부딪혔을 때 혹은 매우 치욕스러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의 아내인 조카스타는 자신이 오이디푸스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펠로피아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하여 아들 아이기스토스를 출산한 후 이 아이를 버린다. 세월이 흘러 이 아이가 집을 찾아 오게 되어 과거가 밝혀지자 펠로피아는 자살하고 만다. 조카스타와 펠로피아는 모두 치욕과 죄책감 앞에 자살로서 책임을 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자살은 비극적 사건이나 치욕스런 진실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삶이 의미없다” 혹은 “삶이 고단하다”라는 생각 때문에 많이 일어난다.

2010년 6월 트위터로 “자살하려 합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이가 있었다. 트위터로 자살을 예고했다는 점보다 오히려 쿨 한 태도가 섬뜩하다. 재개발 때문에 문을 닫게 된 식당에 앞에 붙은, “재개발로 폐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이용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는 문구를 연상시킨다.  자살도 가게의 폐업처럼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 젊은이의 자살은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모두 의미 없어. 내게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설득하려 들지 마. 안녕, 이 세상! 안녕, 삶!”

이런 쿨한 태도는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체제 아래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는 삶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의심, 즉 “삶에는 의미가 없다”라는 파괴적인 생각을 아주 오랫동안 품고 있을 때에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쿨 한 태도는 “내 목숨은 나의 것이다”라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감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체제는 개인이 의심을 품고 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고 개인주의적 감각을 기르도록 놔두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의 자살율은 세계 최고이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개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의미없어. 내 목숨을 내가 끊는 데 왜 참견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자살 예고 메시지를 보내고 쿨 하게 목숨을 끊은 젊은이의 죽음은 자살이 일상적(!)인 개인의 일이 되어버린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다.

개인으로 산다는 것이 이토록 황량하고 삭막한 일일까? 그렇다. 황량하고 삭막하다. 단, 몸은 개인의 대지를 딛고 있지만 머리는 아직 개인으로서 사는 법을 알지 못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이런 사람의 경우, 몸의 자유만 극단으로 치달아 자신을 파괴할 자유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다른 말로 죽음을 추구할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자살까페이다. ,

*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Sun-bath nakedness’

** 60년대 초만해도 평일에 북한산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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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과 사려(2)

조현오 내정자의 발언 전문이 나왔다.

http://news.donga.com/Politics/3/00/20100816/30536974/1

노무현 차명계좌 운운은 모르겠지만,

‘동물 처럼’ 부분은 앞뒤 문맥을 보면 악의를 가지고 한 발언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조 내정자가 충분히 사과하고…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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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과 사려의 실종

조현오 청장 내정자의 언행은 감각과 사려가 완전히 실종된 고위 공직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 역시 노무현전대통령의 자살에 대해서는 비난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다른 무엇보다 마을 뒷산에서 투신했다는 점이 정말 ‘정떨어지게’ 만든다.

밤에 등산을 하다보면 수리부엉이를 만날때가 있다. 바위에 붙어 앉은 수리부엉이의 실루엣은 꼭 10대초반의 아이가 바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람이 다가가면 날개를 펴고 나는 데, 날개 끝에서 끝의 길이가 거의 2 미터에 이른다. 밤에 산에서 수리부엉이를 마주치면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 다른 한 편으로는 경이로운 마음이 생긴다.

마을 뒷산 바위를 ‘부엉이 바위’라고 이름붙였을 때에는, 그 마을을 지켜주는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이다.

그런데 노전대통령의 투신으로 인해, 이제 그 바위는 ‘자살바위’ 혹은 ‘뜀바위’가 되고 말았다.

이건, 마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또한 나 역시 텔레비전이 천안함 유족 중 일부 사람들의 특정한 모습만을 집중해서 조명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내가 무엇인가 크게 슬픈 일이 있어, 눈물콧물이 범벅이 된 상태가 전국 방송에 나가게 된다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공적인 자리에서  ”동물처럼…” 운운하는 것은 좀 아니다.

고위공직자들은 언행에 신중해야 한다. 혼자, 혹은 가족/친지끼리 이야기할 때에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공적인 자리에서, 공적인 발언을 할 때에는 누구가 들어도 오해하지 않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지금 한국은 단군이래 처음 있는 사회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광범위한 계층 분화가 진행중이며 심각한 청년 실업이 만성화되고 있다. 사회적 약자와 사회적 강자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고위공직자는 강자이며 승리한 자이다. 강자, 승리자가 사람들의 고통과 소외감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senseless), 혹은 이를 이해하려는 생각이 없는(thoughtless) 경우, 깊게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실망에서 그치는 정도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좌절, 분노, 계층적 적대감을 쌓게 만든다.

잘 나가는 사람, 이긴 사람, 강한 사람들아!

제발 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한 감각과 사려를 좀 가지기를….

그게 도덕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게 바로 당신들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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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과 중소기업을 챙긴다고라?

요즘 분위기는 대기업 압박하기이다.

그래서 대기업의 이익을 협력사와 나누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너도 나도 한다.

글쎄.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1차 벤더(1차 협력사)만 되어도 감지덕지다.

2차, 3차 내려가면서 악화되기 때문이다.

정부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기업이 1차 협력사를 두둑하게 챙겨주었다고 치자.

2차, 3차, 4차는 어떻게 할텐데?

시장에서 대기업과 그 협력사가 매칭되는 것인데…

대기업에 대고 시장 밖의 압력을 가해봐야 그 효과는 미미하거나 아니면 이상한 효과가 난다.

청년실업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청년 전용 취로사업’을 하겠다는 건가? 그런 알바성 자리는 이미 많고 넘친다. 88만원 인생.

정부가 백날 고용대책 내놓아봐야 …시장 밖에서, 시장에 개입하려는 노력은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 한다.

이건, 오히려 초기 벤처 투자(early stage venture investment)로 풀어야 한다.

최대 투자금액 10억원 정도로…초기 단계 투자를 하는 투자 재원을 왕창 확보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양질의 초기 벤처 투자 활동이 없다.

벤처 사들은 이런 종류의 투자활동을 하지 않은지 몇 년 된다.

대기업들이 1분기에 1조씩 투자 펀드에 투자하고,

정부가 그에 매칭하여 1조씩 투자 펀드에 투자해서…

모태펀드를 만들어..양질의 [초기단계 벤처 투자 전문] 금융 활동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제 우리 사회는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시장 밖의 방법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다.

시장 논리를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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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탄생(2)

(제가 요즘 책을 쓰고 있어서 별도의 포스트를 쓰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책의 일부를 연속해서 올리고자 합니다. 이 경우 글 제목은 항상 개인의 탄생 이 될 것입니다. )

“개인 행동 하지마!”

자주 듣는 꾸중이다.

“그 사람은 개인주의자야. 항상 자기 잇속만 챙기면서 문제를 일으켜!”

직장 회식 자리에서 이런 말로 비난 받은 사람은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남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태도를 뜻한다. “개인주의자”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탐욕스럽고 흉악한 한 마리 짐승에 가까운 존재로 치부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저는 골수 개인주의자입니다. 국가나 민족은 저에게는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동체’라구요? 그것도 부차적입니다. 저에게는 저 자신의 입맛과 기준이 가장 원천적인 가치입니다.”

돌팔매질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인다. 그런들? 우리는 매순간 스스로를 개인으로 느끼면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왜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꺼림직하게 여기는 것일까? 왜 개인을 움직이는 힘, 즉 욕망이나 이기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 명백한 현실을 왜 감추려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개인이 등장한 것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본격적으로 ‘개인’이라는 주제가 거론된 것은 ‘각성의 시대’*에 들어서 시작된 일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1692년에서 1693년에 걸쳐 메사추세츠의 살렘(Salem) 지역 일대에서 지구 최후의 기독교 종교재판이 벌어졌다. 수 백 명의 사람이 체포되었고 수십 명이 “악마와 소통했다”는 죄목으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다섯 명이 옥사했고 열 아홉 명이 교수형을 당했으며 한 명은 무거운 돌을 몸 위에 얹어 갈아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한마디로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830년대에 미국 사회를 깊게 관찰한 프랑스 사상가 토크빌(Tocqueville)은 미국 사회 저변에 깊게 흐르는 순응주의(conformism) 문화를 이렇게 비판했다.

미국보다 더 정신의 독립성과 토론의 자유가 결여되어 있는 나라를 나는 알지 못 한다.

File:Alexis de tocqueville.jpg

Alexis Tocqueville

시끄러운 것보다는 조용한 것이 더 무섭고, 육체적 폭력보다는 정신적 폭력이 더 무섭다. 마찬가지로 폭도와 군중이 날뛰는 상태보다 사람의 정신을 지배해서 순응하도록 만든 상태가 더 무섭다. 지배적 가치, 믿음, 제도에 대해 의문을 던지거나 반발하지 못 하는 상태, 즉 순응주의가 만연한 상태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런 상태는 개인의 영혼을 조용하고 부드럽게 질식시켜 죽인다. 토크빌의 관찰이 옳다면, 지금 개인주의 문화가 가장 강력하게 자리잡은 미국마저도 19세기 초반에는 사람들이 순응주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던 상태였다.

놀랄 일이 아니다. 인류는 수 만 년 이상 ‘떼’ 중심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떼’를 벗어나는 순간 따돌림과 징벌을 당해야 하는 상태에서 생존해왔다. ‘떼’야말로 아주 오랫동안 인류의 생존방식, 생존전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공공연하게 추구하고, 이러한 태도를 찬양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의 판단 기준과 도덕관을 내세우는 사람, 즉 개인은 ‘공공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전통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은 낯설고 위험한 종족이었으며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유럽 전통사회에서는 이런 존재를 ‘자유혼’(free spirit)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흔히 계몽주의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는 마땅히 ‘각성의 시대’라고 불러야 한다. 첫째, Enlightenment 라는 말은 계몽이 아니라 각성, 깨달음을 뜻한다. 둘째, 이 시기는 어떤 한 종류의 ‘주의’가 지배한 시기가 아니라, 여러 가지 입장을 가진 많은 사상가들이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깨달음을 쏟아낸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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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탄생 (1)

(제가 요즘 책을 쓰고 있어서 별도의 포스트를 쓰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책의 일부를 연속해서 올리고자 합니다. 이 경우 글 제목은 항상 개인의 탄생 이 될 것입니다. )

개인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 보는 관점, 즉 개인주의는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두 개의 전혀 다른 흐름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이야말로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 원리라고 보는 정치 철학이다. 이는 18세기 후반 영국의 아담 스미스와 존 로크가 최초로 정립했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 정서에 관한 이론’(Theory of Moral Sentiments) 과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개인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즉 시장 원리에 의해, 재화와 서비스의 순조로운 생산/교환으로 그 총체적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밝혔다. 존 로크는, 시장에서의 교환은 아무리 불공정한 경우라 하더라도, 애초에 교환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보다는 더 낳은 결과를 가지고 온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이러한 개인주의를 시장 개인주의**라 부른다.

Adam Smith

개인주의에 관한 또 다른 관점은, 개인을 도덕의 주체로 본다. 이 관점은 18세기 후반에 독일의 이마뉴엘 칸트(Immanuel Kant)에 의해 정립되었다. 칸트는 도덕의 주체로서의 개인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파악했다. 그는 ‘보편적 인류에 조응하는 보편적 도덕성을 갖춘 개인’을 주장했다.  뒤르깽은 칸트의 핵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리했다.

“행동의 동기가 자기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인류의 관점에서 나왔을 때 비로소 그 행동은 제대로 된 행동이다….자기가 선호하는 사회적 입장, 자기가 처한 사회적 조건, 자기가 속한 계급을 논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행동했다면 그 행동은 나쁜 행동이다…도덕적 행동은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적용될 수 있는 행동이어야 한다…’모든 인간’이라는 개념은 ‘인간 일반’을 뜻한다.”

칸트는 ‘이성을 갖춘 보편적 개인의 자율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성을 갖춘 보편적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일정한 이해관계, 일정한 입장, 일정한 관점에 의해 구속되어 있다. 그러한 구속을 뛰어넘게 하는 에너지와 동기를 밝히지 못 한 채 보편적 개인을 주장하면 오히려 끔직한 전체주의로 치달을 수 있다. 뒤르깽은 그래서 “칸트에서 헤겔과 마르크스가 나왔다”라고 개탄했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와 조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개인주의의 두 개의 얼굴, 시장 개인주의와 윤리 개인주의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 아담 스미스는 도덕의 원천이, 타인에 대한 공감(sympathy)라고 보았다.

** 20 세기에는 로버트 노직(Robet Nozick), 아인 랜드(Ayn Rnad) 등이 가장 맹렬한 시장 개인주의(market individualism) 사상가들로 꼽힌다.  특히 노직의 경우 ‘시장 개인주의’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가장 명확하게 사용한 사상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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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증오

(제가 글을 쓰는 게시판에 올린 꼭지입니다. 아래의,  개인주의에 관한 글에 대한 후속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죄다 aaa 님 때문입니다. 원망이 그득합니다. aaa 님이 저더러 “당신이 생각하는 개인주의가 머여?”라고 물어서..저의 앙상한 두 개의 ‘윤리 원칙’ (이걸 윤리라고 부를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을 썼다가…
암튼 덕분에 주말에 오랫만에 실컷 게시판 놀이 했습니다. 감사. 꾸벅.
그나저나,  bbb님이 다음 말을 해 주셔서…아예 한 꼭지 씁니다.
(방모님의) 윤리 개인주의는 (이 사이트의) 회의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윤리 개인주의의 두가지 요소(말을 바꿔보면, 첫번째는 지적요소, 두번째는 규범적.조직적 요소)를 실제로 관찰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드물어요. 특히 지속되는 것을 보기는 정말 어렵지요. 교정되거나 추가된, ‘계몽주의적 이상’의 퇴행된 혹은 증보된 버전일 뿐이다~ 극단적인 입장에서는 이런 평가도 나올법 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거 제 문제점, 약점을 정확히 짚은 말입니다. 저랑 약간 다른 점은 있지만. 저는 다음 두 가지 ‘윤리 원칙’을 꺼냈죠.
1) 머리의 정직성에 대한 존중 Cherish intellectual integrity!
2) ‘자기 정당성에 관한 도취’에 대한 증오 Hate self-righteousness!
이 중 두 번째 것이 반드시 ‘규범적, 조직적 요소’ (bbb님이 말하는 바, ‘지적요소’에 대비되는..)인 것은 아닙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동전의 앞뒷면입니다. 특정 미덕을 존중하기에, 그 미덕에 정반대되는 악덕을 증오하는 것입니다. 혹은 특정 악덕을 증오하기에, 그 악덕에 정반대되는 미덕을 존중하는 것이지요. “증오가 없는 사랑은 믿지 말라”는 게 제 좌우명입니다.
(아, 물론 이 때 증오와 사랑은 특정 가치에 대한 증오와 사랑입니다. 사람에 대한 게 아닙니다. 특히 이성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그런데 저의 이런 증오/사랑이…..’계몽주의적 이상’의 퇴보된 혹은 증보된 버전인가? 여부입니다.
제 용어로 하면, ‘각성의 시대, 특히 칸트가 말하는 [합리적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이상의 퇴보된, 혹은 증보된 버전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저는 계몽주의 보담은 ‘각성의 시대’란 말을 좋아합니다)
이거 제 실력으로는 명확한 답을 못 합니다. 기냥 저의 조악한 생각으로는, 칸트의 이상과는 좀 ‘과’가 다른 종류의 사랑/증오입니다. 종자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칸트의 원전(영어본이락두)을 읽지 못 합니다. 숨이 턱 막힙니다.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저는 읽히는 책만 읽습니다. 다행히 아카데미아에서 철학으로 밥 먹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게으름을 부려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제가 아는 칸트는 secondary source입니다. 그런 깜냥이나마, 제가 말한 ‘윤리’(사랑/증오)는 칸트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계몽주의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합리적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위라는 개념 (categorical imperative)은 저에게 거의 두드러기를 일으키게 합니다.
제가, ii(intellectual integrity)에 대한 사랑과, sr(self-righteousness)에 대한 증오를 택한 이유는, 당위나 도덕 관념 때문이 아닙니다. 멋있기 때문입니다. 그거 말고는, 인생에서 할 만 한 멋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즉 저의 ii사랑과 sr증오의 밑바닥에는 입맛(aesthectic, 미학)이 깔려 있습니다. 멋있다는 ‘맛있다’는 소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조지오 아르마니 수트를 한 3일 푹 고아서 먹으면 맛있을 겁니다…^^) 저의 경우, 윤리의 원천은 혓바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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